안녕하세요. 임상시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엘리입니다.
임상시험을 조금이라도 경험해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이 데이터는 그냥 쓰면 안 됩니다.” 처음 이 말을 들으면 의아합니다. 이미 검사도 했고, 결과도 나왔는데 왜 바로 쓰지 못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임상시험에서 데이터는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데이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가 함께 설명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임상시험 데이터는 치료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부산물이 아닙니다. 연구계획서에 따라 사전에 정의된 조건에서, 정해진 방법으로 수집된 정보만이 임상시험 데이터로 인정됩니다. 같은 검사 결과라도 언제, 누구에게, 어떤 기준으로 시행되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않으면, 데이터는 연구의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그냥 쓰면 안 된다’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데이터의 출처와 맥락이 명확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데이터가 어느 시점에 수집되었는지, 연구계획서에서 정한 방문 일정과 일치하는지, 동일한 방법으로 반복 측정되었는지가 확인되어야 합니다. 맥락이 불분명한 데이터는 해석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데이터는 연구 결과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둘째,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임상시험에서는 수집된 데이터가 그대로 최종 결과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입력 오류는 없는지, 논리적으로 맞는지, 다른 기록과 일관되는지를 확인하는 검증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과정 없이 데이터가 사용된다면, 연구 결과 전체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국제 기준인 ICH-GCP(국제 임상시험 관리기준)는 임상시험 데이터에 대해 ‘정확성, 완전성, 검증 가능성’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데이터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 “이 결과는 어떻게 나온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 경로를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국내에서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의약품 임상시험 관리기준(KGCP)」은 임상시험 자료가 원자료(source data)와 일치해야 하며, 변경 이력이 명확히 남아 있어야 한다고 규정합니다. 이는 데이터가 한 번 입력되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 전체가 관리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장에서 데이터 검증이 중요한 이유는, 데이터 오류가 생각보다 쉽게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숫자 하나가 잘못 입력되거나, 날짜가 어긋나거나, 방문 순서가 바뀌는 일은 드물지 않습니다. 이런 오류는 악의에서 비롯되는 경우보다, 바쁜 환경과 반복 업무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그래서 임상시험에서는 사람의 주의력에만 의존하지 않고, 제도적으로 오류를 걸러내는 구조를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는 여러 단계를 거쳐 다듬어집니다. 현장에서 수집된 데이터는 입력되고, 검토되고, 필요하면 수정됩니다. 중요한 점은 수정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수정의 이유와 과정이 명확히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수정이 필요했는지,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수정했는지가 기록되지 않으면, 데이터의 신뢰성은 오히려 떨어집니다.
그래서 임상시험에서는 데이터 수정도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수정은 항상 기록을 동반하고, 원래 값과 수정된 값이 모두 남아야 합니다. 이는 데이터를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데이터가 만들어진 과정을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투명성은 임상시험 데이터의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입니다.
임상시험 데이터가 그냥 쓰이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비교 가능성 때문입니다. 임상시험은 한 사람의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결과를 비교해 의미를 도출합니다. 이때 데이터 수집 방식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비교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같은 잣대로 측정되지 않은 데이터는 함께 분석할 수 없습니다.
이 때문에 임상시험에서는 연구가 시작되기 전부터 데이터 수집 기준을 정합니다. 어떤 검사 결과를, 어떤 단위로, 어떤 시점에 수집할지 미리 정해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기준을 벗어난 데이터는 ‘있어도 쓸 수 없는 데이터’가 됩니다. 현장에서 “데이터는 있는데 못 쓴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데이터를 그냥 쓰지 않는 태도는 임상시험을 까다롭게 만드는 요소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태도가 없다면, 임상시험 결과는 쉽게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한 번 발표된 연구 결과는 의료 현장과 정책, 환자의 선택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부정확한 데이터에 기반했다면, 그 영향 역시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임상시험에서 데이터는 치료를 증명하는 도구이자, 치료를 견제하는 장치입니다. 효과만을 강조하는 데이터는 위험하고, 위험만을 과장하는 데이터도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데이터는 정해진 기준과 절차 안에서 관리되어야 합니다. 이 기준을 지키는 과정이 바로 “그냥 쓰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이 흐름을 이해하면, 임상시험에서 데이터 검증과 관리가 왜 반복해서 강조되는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데이터는 많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데이터여야 합니다. 임상시험은 데이터의 양보다, 데이터가 만들어진 과정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임상시험 데이터는 결코 ‘그냥’ 쓰이지 않습니다.
관련 법·규정 근거
· ICH-GCP (Good Clinical Practice)
: 임상시험 데이터의 정확성, 완전성, 추적 가능성을 핵심 원칙으로 규정
· 「의약품 임상시험 관리기준(KGCP)」
: 원자료 일치성, 데이터 수정 이력 관리, 검증 절차를 필수 요건으로 명시
·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 연구 자료의 신뢰성과 관리 책임을 연구 수행자의 의무로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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